송다인 답사보고서 2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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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문학 콘텐츠

박물관에서 찾은 나의 호기심

고려 제31대왕인 공민왕(1330~1374)과 그의 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나란히 병좌한 부부초상화이다. 고려말의 복식을 갖추고, 고식의 기법을 따랐으나 후에 이모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도상법에 따라 그대로 묘사되어 초상화가 갖는 사실위주의 핍진성보다는 도식적인 면모가 강한데 무속에서 왕신(王神)으로 공민왕이 신당에 모셔졌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호기심의 확장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은 누가 언제 그렸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는 종묘의 공민왕 신당에 봉안되어 있었으며 현재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에서 출발한 나의 호기심은 노국대장공주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장되었다. 노국대장공주 패아지근씨(魯國大長公主 孛兒只斤氏)고려 공민왕의 적후(嫡后)이자 순종의 손자인 위왕 베이르 테무르의 딸이다. 본명은 보르지긴 보타슈리이며 공민왕이 지어준 고려식 이름은 왕가진(王佳珍)이다.

원나라의 공주였던 노국대장공주는 원에 볼모로 와 있던 보위 전의 공민왕과 정략 결혼을 하였으며 공민왕이 고려로 돌아갈 때 원으로부터 승의공주(承懿公主)에 책봉되었다. 그는 원나라 사람이었지만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펼치자 자신의 고국을 배척하고 적극적으로 그를 도왔다고 한다. 다만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후에 노국공주는 아이를 가졌으나 난산으로 죽고 만다. 노국공주의 죽음에 낙담한 공민왕은 자신이 직접 주관하여 9년 동안 현정릉이라는 묘를 지었고, 자신도 사후에 그 무덤에 함께 묻혔다. 현정릉북한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봉명산의 중턱에 있으며, 서쪽 것이 고려 31대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玄陵)이고 동쪽 것이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正陵)이다. 두 무덤 사이에는 영혼이 통과할 수 있도록 작은 통로가 놓여져 있다고 한다. 공민왕은 그가 죽은 지 얼마 후 정치권을 신돈(辛旽)에게 양도했다. 신돈은 노비와 토지개혁에 중점을 두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노비를 석방하는 등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권문세족과 귀족의 미움을 받고 결국 모함을 사 처형당하게 된다.

또 노국대장공주와 관련된 다른 기록을 찾아보니, <조선왕조실록> 연산 21권에 연산군이 노국 대장 공주의 화상을 대궐 안으로 들여 오도록 전교하였다는 내용이 있었다. 연산군은 모후인 폐비 윤씨와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였다고 한다.[1]

지식노드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공민왕과_노국대장공주_초상 노국대장공주 A에는_B가_그려져있다
공민왕과_노국대장공주_초상 공민왕 A에는_B가_그려져있다
경기도_박물관 공민왕과_노국대장공주_초상 A는_B의_소장처이다
종묘_공민왕_신당 공민왕과_노국대장공주_초상 A는_B의_과거_봉안되었던_장소이다
현정릉 공민왕 A는_B의_무덤이다
현정릉 노국대장공주 A는_B의_무덤이다
연산군 노국대장공주 A는_B와_관련이있다
폐비_윤씨 노국대장공주 A는_B와_모습이_닮았다
폐비_윤씨 연산군 A는_B의_부모이다
조선왕조실록 노국대장공주 A는_B와_관련이있다
공민왕 노국대장공주 A는_B와_결혼했다
노국대장공주 원나라 A의_고국은_B이다
공민왕 고려 A의_고국은_B이다
연산군 조선 A의_고국은_B이다
폐비 윤씨 조선 A의_고국은_B이다
공민왕 반원_정책 A는_B를_주도하였다
신돈 개혁 A는_B를_주도하였다
신돈 전민변정도감 A는_B를_설치하였다
신돈 공민왕 A는_B의_신하이다

참고자료

기말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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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왕조실록》 연산 21권, 3년(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2월 15일(정해) 3번째기사 - 노국 대장 공주의 화상을 대궐 안으로 들여 오도록 전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