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 답사보고서 2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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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찾은 나의 호기심

정조어제선조어서밀찰발.png

이 문서는 송언신(宋言愼 1542~1612)의 후손 집안에 소장되어 있던 「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 宣祖御書賜宋言愼密札帖」을 200년 후인 1793년, 정조가 이를 보고는 이듬해 읽은 소감을 적은 글이다.[1]


원래의 제목은「이조판서영양공송언신가장선묘어서밀찰발 吏曹判書榮襄公宋言愼家藏宣廟御書密札跋」로 선조가 송언신에게 직접 써서 하사한 7건의 어찰에 대하여 해설을 곁들여 기술한 것으로 임금과 신하간의 제회를 극히 찬양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선조가 지방관리들을 통제하는 수완을 엿볼 수 있으며, 당시 조선의 국방, 군신간의 사신왕래와 선물교환, 가족제도 및 송언신의 가계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이후 정조의 명으로 광주의 어서각에 보관되었다.[2]

호기심의 확장

네트워크 그래프

조선시대 선조가 직접 써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송언신(1542∼1612)에게 남모르게 보낸 서찰 7건이다. 송언신은 선조 10년(1577)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쳐 호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를 지냈다. 명종 때에는 불교를 배척하여 중 보우를 처형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서첩은 원래 길게 이어있던 종이를 옆으로 적당하게 잘라, 그 앞뒤에 따로 표지를 붙인 것이다. 정조가 이 서첩을 보고 나서 7건에 대한 내용해설을 곁들여 직접 발문을 지어내리고, 호조판서에게 명하여 원첩을 궤에 담아 송언신의 후손에게 되돌려주고 따로 한 부를 똑같이 써서 내각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 어사첩은 이때 모사된 것이다.

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은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면서 왕의 자녀 3인을 찾아 보호해 달라는 내용과 그 공을 높이 사서 물품을 하사한다는 내용 등이 들어있으며, 크기는 가로 24.2cm, 세로 36.6cm이다.

정조어제선조어서밀찰발선조어서밀찰을 보고 소감을 적은 것으로 총 59줄을 6줄씩 총 10면으로 나누어 놓았다. 만력십삼년십이월십팔일예조입안은 송언신에게 자식이 없어 10촌형되는 사람에게서 자식을 입양하는 것을 만력 13년(선조 18년,1585) 2월 18일 예조에서 허락한다는 문서이다.

이 책을 통해 선조가 지방관리들을 통제하는 수완을 엿볼 수 있으며, 당시 조선의 국방, 군신간의 사신왕래와 선물교환, 가족제도 및 송언신의 가계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지식노드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송언신 선조 A는_B의_신하이다
송언신 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 A는_B를_작성했다
정조 송언신_선조어서사송언실밀찰첩 A는_B를_우연히 읽게 된다
송언신_후손 선조어서사송언실밀찰첩 A는_B를_소장했었다
정조 송언신_선조어서사송언실밀찰첩 A는_B에_감명받는다
정조 정조어제선조어서밀찰발 A는_B를_작성한다
경기도 박물관 정조어제선조어서밀찰발 A는_B를_소장한다
정조 화성능행도 A는_B와_관련있다
화성능행도 장한종 A는_B에 의해_그려졌다
장한종 장준량 A는_B의_아버지이다
장준량 어해도 A는_B를_그렸다
화성능행도 이명규 A는_B에 의해_그려졌다
화성능행도 김득신 A는_B에 의해_그려졌다
김득신 취선도 A는_B를_그렸다
취선도 회화 A는_B의 기법으로_그려졌다

참고자료


정의

내용

선조어서 사송언신 밀찰첩(宣祖御書賜宋言愼密札帖)』과 『정조어제 선조어서 밀찰발(正祖御製宣祖御書密札跋)』은 모두 2첩으로 묶여진 고문서로, 1987년 12월 26일 보물 제941호로 문화재청에 지정 등록되었다가, 2004년 영정과 분리되고 명칭도 변경되었다.

두 문서는 정조의 명(命)에 의하여 광주(廣州)에 어서각(御書閣)을 건립(建立)하여 그 곳에 보관해오다가 1970년 경기도 성남시(城南市) 지구개발(地區開發)로 그 지역이 수용되면서,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모선재(慕先齋)로 옮겨 보관했다. 그러다가 1999년 여산송씨 호봉공 종중에서 경기도박물관에 기탁하였다.

송언신은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좌랑·병조정랑·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을 역임하고,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공조참판이 되어 평안도순찰사를 겸하다가 다시 함경도순찰사를 겸하면서 군병(軍兵) 보집에 힘썼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등에 책록되었고, 이 문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정황을 담은 문서이다. 이 일로 그는 선조의 특별한 신임을 얻어 이조판서까지 역임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어려운 시기에 양사의 장을 역임하면서 당쟁의 선봉이 되었다가, 광해군 초년에 축출되었다.

선조어서 사송언신 밀찰첩』은 선조가 송언신에게 12년에 걸쳐 직접 써서 내린 밀찰 7건과 별지 2장을 합쳐서 첩의 형태로 보관되어 있다. 서첩은 원래 길게 이어져 있던 종이를 옆으로 적당하게 잘라, 앞뒤에 따로 표지를 붙인 것이다.

정조가 이 서첩을 보고 나서 7건에 대한 내용 해설을 곁들여 직접 발문을 지어 내리고, 호조판서에게 명하여 원첩을 궤에 담아 송언신의 후손에게 되돌려주고 따로 한 부를 똑같이 써서 내각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정조어제 선조어서 밀찰발』이고, 『선조어서 사송언신 밀찰첩』도 그 때 개장(改粧)하였다.

선조어서 사송언신 밀찰첩』은 모두 7건이다. 첫번째 밀찰의 내용은 1593년 7월에 쓴 것으로 선조가 행재소인 의주에서 보낸 것이다. 북도의 일을 위임하고 피난 중 헤어진 딸 둘과 아들 한 명을 찾아 보호해달라는 내용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밀찰은 1597년 9월부터 11월의 것으로 국가가 어수선함을 왕 자신의 죄로 자책한다는 것과, 송언신의 공(功)과 그가 올린 진상품에 대한 대가로 하사품을 내린다는 내용이다.

네 번째 밀찰은 1598년의 것으로 비방에 구애받지 말고 직무에 전념하라는 내용이다. 다섯 번째 밀찰 역시 1598년에 쓴 것인데, 송언신이 건의한 장수 임명의 일은 이미 늦었음을 알리는 내용으로, 그에게 내린 하사품의 사물단자가 첨부되어 있다.

여섯 번째 밀찰도 1598년에 쓴 것으로 북방의 방어와 이를 방비할 적임의 장수를 얻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일곱 번째는 1599년 송언신이 서울로 돌아올 것을 허락한다는 내용으로 별지가 포함되어 있다.

『정조어제 선조어서 밀찰발』은 원래 제목이 ‘이조판서영양공송언신가장선묘어서밀찰발(吏曹判書榮襄公宋言愼家藏宣廟御書密札跋)’이다. 선조가 송언신에게 직접 써서 하사한 7건의 어찰(御札)에 대하여 해설을 곁들여 기술한 것으로, 임금과 신하 간의 제회(際會)를 극히 찬양하고 있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선조 송언신 왕과 신하 관계


멀티미디어

『여산송씨 기증고문서』(경기도박물관, 2002) 『경기도박물관 명품선』(경기도박물관, 2004) 『경기문화재총람』2(경기도, 2005)

기여

문화영 : 처음 작성

주석

  1. [1], 정조
  2. [2], 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