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진 지콘 답사보고서 2018-1

HUFS KContent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나의 인문학 콘텐츠

박물관에서 찾은 나의 호기심

소림(小琳) 조석진[1] (趙錫晉 1853~1920)은 조선시대 마지막 도화서 (圖畵署) 화원(畵員)으로 저명한 화가인 그의 조부 조정규 (趙廷奎 1791~?)의 필법을 익혀 어해 / 산수 / 인물 / 화조 등 모든 화제에 능하였다. 또한 말년에는 서화미술원의 교수로 있으면서 근대 전통 회화를 주도한 화가들을 많이 배출 시켰다.

현존하는 작품 중 노안도영모도 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가운데, 이 영모도는 소재와 형식에 충실했던 그의 화풍상의 변천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2]이다.

이 작품[3]은 10폭 병풍에 사슴, 소나무, 새, 꽃, 토끼, 매화나무, 소, 닭, 염소, 학 등의 소재를 각각 안배하였다. 사슴, 원앙, 닭, 매, 학 등은 화조영모화에서 전통적으로 그려졌던 소재였으나 단독으로 그려진 사자, 이전과는 다르게 표현된 소의 모습에서 근대 회화의 새로운 면을 엿볼 수 있다. 간결한 구도에 수묵의 엷은 채색을 가한 맑은 채색표현과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호기심의 확장

  • 영모도에서 출발한 나의 호기심은 영모화훼화 , 영모화[4] , 그리고 화훼화[5]라는 용어와 대표적인 화가로까지 확장되었다. 먼저, 영모라는 뜻은 새의 날개와 짐승의 털을 뜻한다. 또한 화훼는 꽃과 풀 의미한다. 따라서 영모화훼화는 새, 짐승, 꽃, 풀을 그린 회화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살펴보니 과거의 영모화는 새의 그림만을 일컫는 단어였지만 현재의 영모화화조화동물화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를 가지는 단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영모화훼화에 그려진 동물, 꽃, 그리고 새들은 각각의 동양의 오랜 전통 속에서 생겨난 좋은 상징 (길상)을 뜻한다[6].



이들 중 김홍도는 내가 사는 곳인 안산에서 널리 알려진 조선 후기 안산출신의 화가인데, 김홍도가 서민문화만을 그렸던 화가인 줄 알았지만 영모도로부터의 호기심의 확장을 통해 황묘농접과 같은 영모화의 대표적인 화가 였다는 사실또한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또 다시 안산 출신의 서화가로 호기심이 확장되었다.


  • 김홍도(金弘道)[10] 는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화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능(士能)·함장(含章), 호는 단원(檀園)·단로(檀老)·단옹(檀翁)·단구(丹邱, 丹丘)·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畵士, 醉畵史, 醉畵師)·첩취옹(輒醉翁)·농한(農漢)·농사옹(農社翁)·대우암(對右庵)·오수당(午睡堂)이다. 증조부는 만호를 지낸 김진창(金震昌), 할아버지는 김수성(金壽星), 아버지는 김석무(金錫武)이다. 처는 성씨는 알 수 없으나 선대가 역관·서리를 지낸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외아들 김양기(金良驥)도 산수화화조도를 잘 그린 화가이다. 김홍도는 현재의 경기도 안산시에서 성장하여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강세황(姜世晃)안산에 거주할 때 그림 지도를 받았다. 안산에서 조선 후기 최대의 화가 김홍도가 성장하는 데에는 18세기 안산이 지녔던 독특한 문화적 힘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안산노론(老論)과의 당쟁을 피해 물러난 남인(南人), 소북(小北)계 문인, 학자들의 중요한 활동처였다. 실학사상의 대가 성호 이익(李瀷)[1681~1763], 문단의 거장인 이용휴(李用休)[1708~1782],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1713~1791]과 허필(許佖)[1709~1768], 강세황의 처남이자 안산 문화계의 구심점이 되었던 진주유씨 유경종(柳慶種)[1714~1784]과 그의 수많은 친구들이 당시 안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유경종은 조부인 이조판서 유명현(柳命賢)[1643~1703]의 고향집을 물려받아 오교장(午橋莊)을 마련하여 현재의 부곡동에 안산 문화계의 사랑방을 제공하였다. 오교장에 드나들었던 인물들은 안정복(安鼎福)[1712~1791], 신광수(申光洙)[1712~1775], 채제공(蔡濟恭)[1720~1799], 목만중(睦萬中)[1727~?] 등 각계의 내로라 하는 인사들이었다. 김홍도는 이러한 안산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로서 기틀을 닦으며, 스승 강세황의 지도를 받고 이용휴로부터 감화받았다. 김홍도의 초기 호인 서호(西湖)는 안산의 첨성리[현 안산시 상록구 일동] 앞바다의 명칭이기도 하다. 21세 때인 1765년(영조 41)을 전후부터 도화서화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해 경현당(景賢堂)에서 수작(受爵)했던 행사를 그린 「경현당수작도(景賢堂受爵圖)」의 병풍 제작에 참여하였다. 28세 때인 1772년 6월 『영희전중수의궤(永禧殿重修儀軌)』의 그림 제작에 참여하였고, 11월에는 변상벽(卞相璧) 등과 함께 존호도감(尊號都監)에 소속되어 어람용 반차도(班次圖)를 그렸다. 다음해 영조의 어진과 [[정조]의 왕세손 시절 초상 작업에 동참화사(同參畵師)로 참여하였다. 1774년(영조 50)에는 장원서별제에서 사포서별제로 전보되었고, 그해 스승 강세황사포서별제가 되어 함께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초상 작업에 동참화사로서 참여하여, 그 공로로 1783년 경상도 안기찰방(安奇察訪)에 제수되었다. 1788년 정조의 명을 받아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다음해 동지정사(冬至正使)인 이성원(李成源)의 군관 직함을 갖고 이명기(李命基)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0년에는 현륭원(顯隆園)의 능침 사찰인 용주사(龍珠寺)의 불탱 작업을 주관 감동하여 그 공로로 정6품 사과(司果) 벼슬에 임용되었다. 1791년에는 정조원유관본(遠遊冠本) 어진 제작에 동참화사로 참여하였고, 그 공로로 그해 충청도 연풍현감(延豊縣監)에 제수되어 만 3년간 근무하였다. 1795년 정조의 현륭원 원행을 그린 「원행을묘의궤도(園行乙卯儀軌圖)」 8폭 병풍을 완성하였다. 1800년 김홍도의 최대 후원자였던 정조가 승하하였다. 60세 때인 1804년(순조 4) 규장각차비대령화원(奎章閣差備待令畵員)에 차정되기도 하였다. 1805년 크게 질병을 앓았고 12월 「추성부도(秋聲賻圖)」를 마지막 작품으로 하여 다음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홍도는 그림의 기예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용모도 뛰어나고 인품과 정신까지 고상했던 것으로 전한다. 예컨대 조희룡은 「김홍도전(金弘道傳)」에서 “단원이 긍재(兢齋)[김득신], 호생관(毫生館)[최북], 고송유수관(古松流水館)[이인문] 사이에서 홀로 독보적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므로 인품이 높아야 그 필법도 높다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은 「단원기(檀園記)」에서 “그 기예가 막 바로 옛사람을 좇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풍채와 정신이 우뚝하니 멀리 빼어나서 진나라, 송나라의 훌륭한 선비 중에나 그 짝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정조김홍도를 총애하여 30여 년간 궁궐의 회사(繪事)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강세황김홍도를 우리나라 금세의 신필(神筆)로 칭송하였다. 김홍도의 화풍은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전기에는 당시의 남종화풍도화서의 전통적 북종화풍을 절충한 화풍을 드러냈으며, 후기에는 문인적 필묵법과 우리나라 자연의 사생을 통해 넓은 공간감과 한국적 시정이 넘치는 현실적 화풍을 형성하였다. 만년에는 거칠고 생략적인 필치를 구사하여 생활 주변의 풍경을 표현하였다. 김홍도는 한국 회화사에 있어 정선(鄭歚)심사정(沈師正)의 전통을 잇는 한편, 금강산 사생이나 영모(翎毛)·화조(花鳥)사생을 통해 우리 취향에 맞는 화풍을 창안해 냈다. 김홍도의 화풍은 신윤복(申潤福), 김득신, 이명기(李命基), 이재관(李在寬), 이수민(李壽民) 등 동료와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조선 후기 화단에 널리 확산되었다. 대표작 회화 작품집으로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단원화첩(檀園畵帖)』·『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해산첩(海山帖)』 등이 있으며, 대표작으로 「서원아집도육첩병풍(西園雅集圖六帖屛風)」·「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단원도(檀園圖)」·「군선도병(群仙圖屛)」·「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또 자필 서첩(書帖)으로는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이 있다.



  • 강세황(姜世晃)[12]안산 출신은 아니지만 안산에서 활동한 조선 후기 안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이자 서화가서화평론가이다.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노죽(露竹)·산향재(山響齋)·표암(豹庵)·표옹(豹翁)이다. 강세황은 한양에서 태어났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한양을 떠나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이주하여 처음 벼슬길에 오르는 61세 때까지 30여 년 간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시, 글씨, 그림을 모두 잘하여 시서화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당시의 문화계 즉 ‘예원(藝苑)’의 총수로 일컬어졌다. 그는 매형인 임정(任珽)의 영향을 받았고, 안산에 거주하며 처남 유경종(柳慶種) 외에도 허필(許佖), 이수봉(李壽鳳) 등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李瀷), 강희언(姜熙彦) 등과도 교유하였다. 영조의 배려로 61세 때 처음 벼슬길에 올라 64세 때 기구과(耆耉科)에, 66세 때 문신정시에 수석 합격하여 영릉참봉(英陵參奉), 사포별제(司圃別提), 병조참의, 한성부판윤 등을 두루 거쳤다. 강세황은 한국 회화사에 있어 산수와 화훼에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켰으며, 진경산수화를 발전시키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등의 공을 남겼다. 작품 세계에 있어 평생 속기(俗氣) 없는 글씨와 문인화를 추구하였으며 공간감의 확대, 담백한 필치, 먹빛의 변화와 맑은 채색 등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또 서화에 대한 확고한 이론과 뛰어난 감식안으로 수많은 서화평을 남겨 당대 최고의 평론가의 위치에 있었다. 제자로는 김홍도(金弘道)신위(申緯) 등이 있다. 문집으로 『표암유고(豹庵遺稿)』가 있으며, 대표적 회화 작품집 및 작품으로 『현정승집(玄亭勝集)』, 『첨재화보(忝齋畵譜)』, 『표현연화첩(豹玄聯畵帖)』,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임왕서첩(臨王書帖)』,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난죽도(蘭竹圖)」, 「묵죽팔폭병풍(墨竹八幅屛風)」 등이 있다.


  • 김명국(金明國)[13]은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안산(安山),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국담(菊潭)·취옹(醉翁)이다. 김명국은 한자를 달리하여 김명국(金命國), 김명국(金鳴國)이라고도 표기한다. 아버지는 김중휘(金重輝),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경복(李慶福)의 딸, 처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김명국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 교수를 지냈다. 1636년(인조 14)과 1643년(인조 21)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는데 사행 기간 동안 그림 요청이 많아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1647년(인조 25)에는 창경궁 중수 공사에 책임화원으로 참여하여 화원 6명과 화승 66명을 총괄하였다. 1651년(효종 1)에는 한시각(韓時覺)과 함께 현종명성후(顯宗明聖后)의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제작에 참여하였다. 김명국의 성격과 그림에 대한 당대의 평을 보면, 우선 정내교(鄭來僑)는 『완암집(浣巖集)』「화사 김명국전(畵師金鳴國傳)」에서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해학에 능했으며, 술을 좋아하여 몹시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어서 대부분의 그림들이 취한 뒤에 그려진 것이다.”라고 김명국의 성품과 기질을 묘사하였다. 또 남태응(南泰膺)은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이다. 그 화법은 앞 시대 사람의 자취를 밟으며 따른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주어진 법도 밖으로 뛰쳐나갔으니 포치와 화법 어느 것 하나 천기(天機)가 아닌 것이 없었다.”라고 하여 신필(神筆)로 극찬하고 있다. 김명국의 그림은 회화사적으로 볼 때 안견파(安堅派)의 화풍을 따른 것도 있으나 대부분 중국 명대(明代) 절파(浙派)인 오소선(吳小仙) 일파의 소위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 화풍으로, 굳세고 거친 필치와 흑백 대비가 심한 묵법(墨法), 분방하게 가해진 준찰(皴擦), 날카롭게 각이 진 윤곽선 등이 특징이다. 또 김명국선종화에도 뛰어났는데 대담하고 힘찬 감필(減筆)이 특징이다. 김명국의 화풍을 이어받은 대표적 화가로 조세걸(曺世傑)이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달마도(達磨圖)」·「기려인물도(騎驢人物圖)」·「관폭도(觀瀑圖)」·「은사도(隱士圖)」·「투기도(鬪碁圖)」·「고사관화도(高士觀畵圖)」·「어정산수도(漁艇山水圖)」 등이 있으며, 작품집으로 『도석인물화첩(道釋人物畵帖)』이 있다.


  • 심사정(沈師正)[14]은 조선 후기 안산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이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이숙(頤叔), 호는 현재(玄齋)·묵선(墨禪)이다. 증조부는 영의정 심지원(沈之源), 할아버지는 심익창(沈益昌), 아버지는 포도를 잘 그렸던 심정주(沈廷胄), 외할아버지는 포도와 인물을 잘 그렸던 정유승(鄭惟升)이다. 사촌형의 아들 심욱진(沈郁鎭)을 양자로 들였다. 심사정 가문은 할아버지 심익창의 과옥(科獄)[조선시대 과거(科擧)의 부정(不正)으로 일어났던 형사사건]과 대역죄로 인해 사대부 사회에서 소외되어 출사하지 못하였다. 어렸을 적에 겸재(謙齋) 정선(鄭敾)에게 그림을 배웠다. 출사길이 막히자 1748년(영조 24) 삼성진전(三聖眞殿)의 어진모사중수도감(御眞摸寫重修都監)에서 감동(監董)을 맡은 것 외에는 평생 그림에만 몰두하였다. 1761년(영조 37) 현재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소재 원당사(元堂寺)에 우거하면서 당시 안산에 거주하고 있던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과 교유하며 『표현연화첩(豹玄聯畵帖)』을 그리기도 하였다. 심사정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등 여러 방면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대담하고 활달한 담묵(淡墨)과 농묵(濃墨)의 사용에서부터 정밀한 세필(細筆)의 묘사에 이르기까지 수묵과 담채를 다양하게 구사하였다. 이규상(李奎象)은 『일몽고(一夢稿)』에서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현재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추앙하였고, 어떤 사람은 겸재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추숭하였는데, 그림이 온 나라에 알려진 것도 비슷하였다.”라고 하여 영조시대 겸재 정선과 쌍벽을 이뤘다고 기술하였다. 심사정의 그림은 한국미술사에 있어 명나라의 오파(吳派)뿐만 아니라 원나라 말 사대가(四大家) 및 오대(五代)의 동원(董源)까지 연구하여 남종화 본원을 파악하고 다시 조선화단에 접목시켜 전통화풍의 기반 위에서 남종화풍을 조선화해 냄으로써 동국진경(東國眞景)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북(崔北), 김홍도(金弘道), 김득신(金得臣), 이인문(李寅文)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산수화의 대표작으로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촉잔도(蜀棧圖)」를 비롯하여 「금강산경도(金剛山景圖)」, 「한양근경도(漢陽近景圖)」, 「명경대(明鏡臺)」, 「만폭동(萬瀑洞)」, 「경구팔경도(京口八景圖)」 등이 있고, 화조·영모화에는 「딱따구리」, 「파초와 잠자리」 등이 대표적이며, 지두화(指頭畵)에는 「하마선인도(蝦蟆仙人圖)」가 있다.


지식노드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조석진 조정규 A는_B와_관련이있다
조석진 영모도 A는_B의_그림을그렸다
경기도_박물관 영모도 A는_B의_소장처이다
조석진 여러가지 동물들 A는_B의_그림을그렸다
경기도_박물관 여러가지 동물들 A는_B의_소장처이다
영모화훼화 영모화 A는_B와_관련이있다
영모화훼화 화훼화 A는_B와_관련이있다
영모화 화조화 A는_B와_관련이있다
영모화 동물화 A는_B와_관련이있다
영모화훼화 길상 A는_B를_포함한다
이암 영모화훼화 A는_B와_관련이있다
모견도 이암 A는_B의_작품이다
김두량 영모화훼화 A는_B와_관련이있다
흑구도 김두량 A는_B의_작품이다
송민고 영모화훼화 A는_B와_관련이있다
청록산수화 송민고 A는_B의_작품이다
묵매도 송민고 A는_B의_작품이다
꽃과 새 송민고 A는_B의_작품이다
변상벽 영모화훼화 A는_B와_관련이있다
묘작도 변상벽 A는_B의_작품이다
김홍도 영모화훼화 A는_B와_관련이있다
황묘농접 김홍도 A는_B의_작품이다
김홍도 안산 A는_B의_출신이다
홍세섭 영모화훼화 A는_B와_관련이있다
유압도 홍세섭 A는_B의_작품이다
장승업 영모화훼화 A는_B와_관련이있다
호취도 장승업 A는_B의_작품이다
허필 안산 A는_B출신_화가이다
심사정 안산 A는_B출신_화가이다
김명국 안산 A는_B출신_화가이다
강세황 안산 A는_B에서_활동한_화가이다
최경 안산 A는_B출신_화가이다

참고자료

  • "[1]", 경기도박물관
  •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4]", 경기도박물관
  3. "[5]", 경기도박물관
  4.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9]", 경기도박물관
  8. "[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11]", 경기도박물관
  10. "김홍도", 디지털안산문화대전, 안산향토문화대백과
  11. "최경", 중앙일보, 문화
  12. "[http://an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ansan&dataType=01&contents_id=GC02501582 강세황}", 디지털안산문화대전, 안산향토문화백과
  13. "김명국", 디지털안산문화대전, 안산향토문화대백과
  14. "심사정", 디지털안산문화대전, 안산향토문화대백과
  15. "허필", 디지털안산문화대전, 안산향토문화대백과